'경기문화저널/제3호'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4.01.07 대만 (臺灣) – 역사의 도시, 최초의 수도 타이난시(臺南市) by 경기도문화원연합회
  2. 2014.01.07 양주시의 역사, 문화 유적을 찾아서 by 경기도문화원연합회
  3. 2014.01.07 역사와 생태가 함께하는 구리문화기행 by 경기도문화원연합회
  4. 2013.12.31 문화원 지킴이 “따르릉 어르신 동요합창단” by 경기도문화원연합회
  5. 2013.12.31 문화원에 전하는 진솔한 이야기 by 경기도문화원연합회
  6. 2013.12.23 10년지기 문화원 by 경기도문화원연합회
  7. 2013.12.23 문화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용인 김장호 원장 by 경기도문화원연합회
  8. 2013.12.20 경기도 문화원 기획사업 심층취재 -과천문화원 by 경기도문화원연합회
  9. 2013.12.20 경기도 문화원 기획사업 심층취재 -이천문화원 by 경기도문화원연합회
  10. 2013.12.20 향토문화 역사의 과거, 현재와 미래 by 경기도문화원연합회

대만 (臺灣) – 역사의 도시, 최초의 수도 타이난시(臺南市)

-문화(文化)의 개발(開發)이냐 보존(保存)이냐, 온고지신주의(溫故知新注意)-



 류정엽(국립성공대학교(國立成功大學) 국제경영관리소(IMBA)




· 한국에서 알려진 단어는 한국어 표기를 우선으로 하였다.

· 지명은 중국어 발음 그대로 표기를 원칙으로 하되, 괄호에 한자를 넣어 그 뜻을 명확하게 하고자 하였다. 지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한국인이 쓰는 한자 발음대로 표기하였다.

· 연도 표기는 대만 자료를 최우선으로 하였으며, 이는 한국 자료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 대만화폐표기는 NTD로 하였으며, 한화로 표기시 한화에서 대만달러(NTD)로 환전하는 평균기준으로 약 1:40 (1NTD=40원)을 기준으             로 하였다.



Ⅰ. 배경

 

  논어의 위정편(爲政篇)에 보면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라는 말이 있다. 이 공자의 가르침을 잘 지키고 따르는 나라가 있다. 바로 대만이다. 대만은 다민족(多民族), 다문화(多文化)국가로 지정학적 위치상 동남아시아의 경제, 문화 등을 연결하는 교두보 역할을 수세기 전부터 해왔다. 중국과 남아시아에서 건너온 이민자를 제외한 원주민 인종 수만 아홉 개 부족을 넘는다.

  지난 5세기 동안 대만은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으며, 중국 명대 정성공(鄭成功, Koxinga)의 지배를 받았고, 청(清)을 거쳐 일본과 중국 국민당(國民黨)의 지배를 받았다. 현재 대만학자들은 대만(臺灣)과 중화민국(中華民國)을 엄연히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있으며 영문표기상 Taiwan과 Republic of China (R.O.C)는 완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90년대 후반의 금융위기와 더불어 2006년에 터진 미국 금융위기로 대만은 심각한 경제위기와 실업을 맞이하였다. 

  그 후 중국과의 경제협력으로 회복세를 보이며 2010년 국내총생산량(GDP)이 10.8% 증가하였고, 명목 국내총생산량이 미화 2만 달러를 넘었으며 실질 소비능력(PPP) 국내총생산은 2010년 미화 3만 5천 달러로 한국을 앞질렀다(출처: International Monetary Fund – 2011 World Economic Outlook). 실업률 1145%를 기록하던 1948년과 비교해볼 때 어마어마한 발전을 하였다.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이 대만을 이끌고 있다. 2011년 대만은 국민당 창당100주년을 맞이하였으며, 대부분 국민들은 현 정부의 100주년을 축하하면서도 제대로 된 역사와 가치정립을 요구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Ⅱ. 대만과 한국과의 관계

 

  우리나라 사람에게 있어서 대만은 가깝지만 먼 나라로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은 대만을 중국의 한 부분으로 중국과 똑같이 취급하고 있으며 심지어 발음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대만을 태국과 같은 나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역사 속에서 대만과 한국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1912년 중국국민당을 창당한 쑨원(孫文, 또는 中山)은 삼민주의(민권, 민족, 민생)를 이념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일조하였다. 1946년 쑨원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장개석(蔣介石)은 중국 공산당에 밀려 대만으로 이주한 후 김구선생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으며, 윤봉길의사 의거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폭적인 정치자금(미화 약 20만달러)을 지원하였고, 김구선생의 한국독립당과 장개석의 국민당은 화교무역 등을 공동으로 추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대만은 국제적 정세와 이승만정부의 중국내의 공산군 숙청 요청을 이유로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또한 미국 33대 대통령 트루만(Truman)의 결정 하에 미군을 대만에서 주둔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화 100만 달러를 1951년부터 1955년까지 경제 원조를 받았다. 1992년 8월 24일 한중(韓中)수교를 계기로 대만은 8월 22일 한국과 국교단절을 선언하였고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인의 소유였던 대만대사관 부지를 국교법에 따라 중국에 이양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만 내에서는 반한(反韓) 감정이 자연스레 고조되었고, 이는 우리나라와의 교류를 단절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약 2007년부터 시작된 대만의 한류열풍을 계기로 대만에서는 점차 반한 감정이 사그라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대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한국음식, 한국어 공부, 한국여행이 하나의 취미이자 트렌드로 자리 잡히기 시작하면서, 국가의 인식이 변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곧 문화 컨텐츠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겠다. 현재는 거의 반한 감정을 찾아볼 수 없으나 일부 보수적인 대만사람이 현재까지도 한국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피하고 있다.

  현재 대만은 한국의 10대 교역국 중의 하나이며, 휴대폰에서는 HTC, LCD에서는 치메이(CHIMEI), 반도체에서는 TSMC가 한국을 바싹 추격하고 있다. 




Ⅲ. 왜 타이난을 알아야 하는가?


  대만의 역사와 문화를 논할 때 타이난시(臺南市)를 빼놓을 수 없다. 타이난시는 대만에서 타이페이(臺北), 까오숑(高雄), 타이쫑(臺中) 다음으로 크고 가장 오래된 도시로 부청(府城)이라고도 불린다. 타이난시가 대만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라고는 하지만 서울을 기준으로 그 크기는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타이난시는 재정상의 문제로 얼마 전 타이난현(縣)과 통합하였으며 타이난현에 있던 도시들을 전부 구(區)로 통합하는 행정개혁을 감행하였다.

  타이난 사람의 주요 교통수단은 스쿠터이며 버스는 관광지를 제외하고 주거지 쪽에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택시는 모든 편의점에서 부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며 추가요금은 없다. 타이난 사람들은 자가용보다는 주로 스쿠터를 타고 다니며, 그만큼 사고도 잦다.

대만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자신을 소개할 때 본인이 어디에서 온 사람(예를 들어 타이난사람)이라고 밝힌다. 이는 곧 본인의 출신지를 밝힘으로 본인이 어떠한 성향을 지녔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흔히     대만에서 타이난 사람이라고 하면 중국어로 “慢慢來的人”(천천히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는 다시 말해 아무리 바빠도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사람으로 흔히 인식되며 상대방에 대해 배려와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한다. 한 예로 다른 도시와는 다르게 도로에서 클랙션 소리를 듣기 힘들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늦게 가도 다들 기다린다.

  타이난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중국어(中文)와 대만사람들 토속어인 대만어(台語)를 사용한다. 대만어는 중국방언으로 민남어(閩南語)라고도 불리며 시노티베트(Sino-Tibetan)어족에 속한다. 그러나 타이난 출신 사람들은 중국어에 있는 권설음(捲舌音)인 [zh], [ch], [sh]의 발음을 정확히 못하는 경향이 있다. 또 다른 타이난 시의 특징은 다른 도시에 비해 평균 연령이 높은 편이다. 대만 사람들 사이에서 ‘젊을 때는 타이페이에서 열심히 일하고 노후 설계는 타이난에서 하라’는 농담이 있다.

  타이난의 음식은 대만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다른 도시 사람들은 문화, 역사 유적지를 구경하며 유명한 음식점에 들려 휴식을 취한다.

  대만에는 문화유산보존법이 있다. 이 법은 1982년에 제정되어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개정되고 있다. 이 법은 대만 문화유산을 보존, 관리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이 법은 가장 오래된 역사의 도시 타이난을 기준으로 제정되었다. 다른 도시들은 법과 도시계획에 문화재, 유적 보존을 넣고 있는 반면에 타이난시 정부는 문화재보존법을 중심으로 비영리단체 문화관련 법인들과 보존사업을 같이 하고 있으며 도시계획에 따로 포함시키고 있지 않다. 타이난시는 문화고적들을 보존 관리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문화유적들은 법에 따라1급, 2급, 3급, 국가지정유적, 지방정부유적, 도시유적으로 나누고 있으며, 이 법에 의해 1급유적 7개, 2급유적 8개, 3급유적 38개, 국가유적 2개 도시유적50개가 있다. 2003년 자료에 의하면 대만 전체 1급유적 24개, 2급 유적 50개, 3급 유적 222개, 16개 국가유적, 74개 지방정부 유적, 169개 도시유적이 있음을 감안할 때 타이난시는 그야말로 문화유산의 도시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Ⅳ. 타이난의 고적


  타이난시는 5년 전, 문화원구(文化園區)라는 이름하에 8개 구역을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또한 시내 도로교통이 불편한 점을 감안하여 고적지를 중심으로 자전거 또는 도보로 둘러볼 수 있게 관리하고 있다.

 


  위의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타이난은 시(市) 전체가 유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이난 역에서 동쪽으로 가면 동안방문화원구(東安坊文化園區), 서쪽으로 가면 기타 문화원구가 있다. 이들 모두 타이난 역을 중심으로 반경 5km 내에 밀집되어 있으며 20년 이상 된 맛집들이 곳곳에 있다. 타이난 시정부에서는 아래와 같은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으며 문화관광 사업관련 비영리단체 역시 이런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타이난시는 시정부(市政府)자체가 직접 문화관광코스를 설계하여 선보이고 있는데, 단순히 특정지역을 어떻게 들려야하는가가 아닌 방문목적, 교통, 소요시간, 감상 포인트, 그리고 방문객의 스케줄에 맞춘 관광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타이난에 자유 여행 시 자동차, 스쿠터를 기차역 주변에서 빌릴 수 있으며 자전거 역시 유적지 주변에서 대여할 수 있다. 시정부에서는 외국인 방문객을 위한 안내서비스를 24시간 운영하고 있으며 거주 외국인을 위한 타이난시 관련 잡지 등을 온라인 및 오프라인으로 배포하고 있다.





1. 타이난 기차역


  타이난 기차역은 타이난시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이지 33년인 1900년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타이난에 기차역이 들어섰다. 당시에는 목조건물로 지어졌으나 1936년(쇼와11년) 현재의 모습을 갖춘 2층으로 된 타이난 기차역을 재건축하였다. 이 건물은 일본 근대식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기차역은 당시 타이난에서 가장 특별한 장소로 알려졌으며, 특히 기차역 2층에는 9개의 방이 있는 여관이 있었다고 한다. 광복 후에는 이 여관이 사유로 바뀌면서 식당이 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사무실로 바뀌었고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다. 가장 눈여겨 볼 점은 1936년 모습을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2. 국립성공대학교(國立成功大學校)


  한국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대학교이다. 성공(成功)은 네덜란드를 내쫓고 동녕왕국(東寧王國)을 세우고 대만 역사를 새로 쓴 정성공(鄭成功)의 이름을 따서 1931년 타이난고등공업학교(臺南高等工業學校) 개교하였다. 11개 캠퍼스, 9개 단과대, 40개 학부, 82개 대학원, 54개 연구소가 있다. 2011년 대학종합평가에 의하면, 국립대만대학교(國立臺灣大學校) 에 이어 대학종합평가 2위를 차지하였으며 대만 상위 3,000대 기업이 가장 선호하는 대학교 1위로 뽑혔다.

  이 곳 캠퍼스 중에서 기차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광복캠퍼스(光復校區)는 일제 메이지 시대 때 일본군 보병 2사단 주둔지였다. 현재 이 건물들은 아주 잘 보존되어 있으며, 각 건물에 역사학과, 인더스트리얼 디자인학과, 예술연구소 등 3개학과가 있다. 학교 자체 역사는 100년이 채 되지 않았으나 100년 넘은 건물을 현재 강의실로 쓰고 있다.





3. 적감루(赤崁樓)


  적감루는 1624년 네덜란드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일종의 초소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건물 꼭대기에서 중국대륙의 명(明)나라 침입을 감시하였으며 근처 지역 안평(安平)에 있는 초소와 통신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명나라가 청(清)나라에 패배할 무렵인 1661년 정성공(鄭成功)이 네덜란드를 대만에서 내쫓고 동녕왕국(東寧王國)을 세운다. 이 과정에서 이 건물은 동녕왕국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곳은 현재 건물 뒤편에 네덜란드의 흔적이 있으며, 시대별로 용도에 맞춰 조금씩 변화하였다. 명나라, 청나라, 일본, 그리고 현재까지의 흔적을 조금씩 찾아볼 수 있다. 적감루는 총 2동(棟)이 있으며 유적을 감상할 수 있고 2층에 올라가면 타이난 시를 볼 수 있다. 또한 매주 주말 저녁이면 시민을 위한 무료 음악회를 열고 있다. 





4. 국립대만문학박물관(國立臺灣文學館)


  대만문학박물관은 건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만문학박물관 건물은 1916년 일본에 의해 지어졌으며 1949년까지 일본 타이난시 정부 건물로 사용되었다. 그 후 중화민국 타이난시정부 건물로 사용하다가 2003년 국립문학박물관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대만문학과 언어의 역사를 한 곳에서 볼 수 있으며, 문학관련 도서관을 지하에 따로 두고 있으며, 1층에는 책을 볼 수 있는 곳이 마련되어 있다.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





5. 안평고보(安平古堡)


  대만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보(城堡)이다. 적감루(赤崁樓)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에 의해 건축되었다. 이후 정성공 및 3대의 집으로 사용되면서 모양이 조금씩 변하였고 통치가 변함에 따라 그 모양도 조금씩 변하였다. 네덜란드가 지은 최초의 성보로 적감루와 함께 통신을 하며 일종의 침략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청나라에 지배를 받으면서 이곳은 군사령부로 바뀌었다.

  현재 이곳은 타이난 주요 관광지 중 하나로 꼽히며, 시장, 각종 먹거리를 비롯하여 오래된 건물이 많다. 이 건물들은 예전에 여러 나라에서 온 회사에서 세운 것으로 현재는 박물관, 식당, 찻집 등으로 대부분 민간화되어 사용하고 있다. 


위의 그림처럼 풍부한 문화자원, 리더십과 시민의식이 포함된 인적자원, 그리고 정부의 정책적 지원 3요소가 적절하게 유지될 때 도시의 지속적인 지역발전이 가능하다. 물론 타이난시가 여러 가지 방면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대만 여러 도시 중에서 참으로 진귀한 도시 중에 하나로서 그 가치는 충분하다고 사려 된다.

찰스 랜드리(Charles Landry)는 그의 저서 ‘The Creative City: A toolkit for Urban Innovators’에서 창조적 도시를 구현하는 공식을 제안했다.

 

창의적 도시 = 도시 발전 × 문화적 정책 + 창의성

 

이 공식은 결코 문화적 자산 하나만으로는 창의적인 도시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문화적 자원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도시발전이 있어야 하겠고 이를 위한 정부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다른 도시와 차별할 수 있는 창의성이 부가될 때 경쟁력 있는 도시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타이난시의 경우 각종 자원과 정책이 도시의 발전과 특색을 결정하고 있으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로서 세계에 도약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Ⅴ. 타이난의 문화사업


  타이난시는 개발(開發)과 보존(保存)의 그 중간인 공존(共存)을 택했다. 타이난은 가장 오래된 도시, 변할 수 없는 도시, 가장 보수적인 대만인들이 살고 있는 도시, 중국어와 대만어가 공존하는 도시, 젊은이보다 노인이 더 많은 도시, 교통 불편한 도시로 무엇인가 새로움과는 거리가 있는 냄새가 난다. 하지만 이 곳 2010년에 당선된 타이난시 시장 라이칭더(賴清德)는 끊임없는 혁신을 추구하며, 문화유물 보존 사업뿐만 아니라 최근 여러 가지 사업을 많이 하고 있다. 최근 3년간 녹색사업을 펼친 결과 도시 내의 공기 중 중금속 함량이 월등히 줄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으며, 국제문화도시로의 도약을 위해 2012년 국제예술제를 개최하여 세계 문화예술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들만의 세계를 선보였다.

  시간이 흐르면 미래는 현재가 되고 현재는 과거가 된다. 과거에 집착만 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 변화가 필요한 것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과거를 무시할 수 없다. 이곳에서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보존 가능한 곳은 전부 보존을 하고 있다. 재정상 유지가 힘든 부분은 이미 민간단체 혹은 사업자로 넘어가 그들만의 사업을 하며 그 자리를 보존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기는 변화 역시 이들은 자연스러운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있다. 한 유물이 특정시대를 반영한다고 해서 그 부분만을 보존하려 하는 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기는 변화 역시 이들은 자연스러운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있다. 한 유물이 특정시대를 반영한다고 해서 그 부분만을 보존하려 하는 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네덜란드 시대에 있었던 건물이 명나라로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용도와 구조가 변했고 정성공의 동녕왕국이 지배하면서 그 용도와 구조가 변했다. 또한 일본이 지배하면서 마찬가지였다. 타이난은 그 자체를 보존하려고 한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낼 수 있다.”





Posted by 경기도문화원연합회

양주시의 역사, 문화 유적을 찾아서




양주는 안동과 함께 4개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을 소유한 조선 최고의 문향(文鄕)이었으며, 국가 무형문화재 두 종(양주 별산대놀이, 양주 소놀이굿)과 도지정 무형문화재 두 종(양주농악, 양주상여와 회다지소리)을 보유한 전통의 고장이자 무수한 국보, 보물, 유적을 지닌 역사의 터전이다.  

홍정덕(양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양주(楊州)>라는 지명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기 전인 935년 견훤의 고려 망명 기사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지명은 현재의 양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한강의 북안 일대, 구체적으로는 현재의 서울을 포괄하는 지역을 지칭하는 명칭이었다. 양주는 고조선, 마한의 영토였고, 온조는 바로 이곳, 양주 땅 하북 위례성에 백제를 건국하였으며 근초고왕이 이 지역을 다시 수도로 삼아 대륙 진출의 근거지 삼았었으나 광개토대왕, 장수태왕이 한성백제를 멸망시키면서 고구려에 점령되어 약 80년간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이어 신라에 점령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지 역할을 하였고 신라군이 양주 매초성 전투에서 당군을 대파함으로서 당의 침략 야욕을 꺾고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새로이 3경의 하나로 부상하는 남경(南京)의 일부가 되었고 한강 이남의 광주(廣州)와 함께 양광도(楊廣道)를 구성하여 실질적인 수도권 근기(近畿)가 되었다가 조선 건국에 즈음하여 한양(漢陽)에 천도하면서 현재의 양주지역이 양주라는 지명을 계승하게 되었다.


  양주는 안동과 함께 4개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을 소유한 조선 최고의 문향(文鄕)이었으며, 국가 무형문화재 두 종(양주 별산대놀이, 양주 소놀이굿)과 도지정 무형문화재 두 종(양주농악, 양주상여와 회다지소리)을 보유한 전통의 고장이자 무수한 국보, 보물, 유적을 지닌 역사의 터전이다.


  그러면 잘 알려진 양주의 역사 문화 유적을 찾아 떠나 보기로 하자.



양주 관아지와 양주별산대 공연장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양주역에 내리면 양주시청 방향으로 떠나는 다양한 노선의 버스를 탈 수 있다. 이 버스를 타고 3 정거장만 지나면 양주 관아지에 닿을 수 있다.

 양주의 읍치는 본래 한양의 중심부에 있었으나, 1394년(태조 3)에 도읍을 송도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지금의 동소문 지대인 대동촌(大東村)으로 옮겼고, 다시 견주(見州)의 옛 터인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다른 지방의 관아지처럼 이곳에도 관아의 정문인 삼문(三門)을 들어서면 임금의 전패를 모시고 있던 객사(客舍)와 수령인 양주 목사가 머물며 행정을 펼치던 동헌(東軒)과 내아(內衙), 그리고 아전들의 사무소인 질청(作廳), 양주 양반들이 모임을 갖던 향청(鄕廳) 등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아울러 경기 중영(中營)으로서의 지휘소 역할을 하던 병영(兵營)과 행형장(行刑場) 등 번듯한 규모의 관아가 있는데, 전란과 병화를 겪으며 모두 훼손되어 현재는 동헌인 매학당(梅鶴堂)만 복원되어 있다. 이와 함께 정조 임금이 광릉(光陵) 참배 길에 양주 관아를 찾아 머물면서 활을 쏘던 사실을 기념하여 세워진 어사대비(御射臺碑)와 역대 양주 목사의 선정비를 모아 전시한 비군(碑群)이 당시의 양주 관아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양주별산대 놀이 전수관


  양주 관아지를 답사했으면 바로 옆에 위치한 <양주별산대놀이> 전수관을 찾아 보자.

양주별산대놀이는 종묘제례에 이어 우리나라 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유서 깊은 민중 문화유산이다. 본래 산대놀이는 궁중에서 연희되던 나례(儺禮)로서 특히 동지(冬至)에 행해지던 수세(守歲) 행사로 중시되었고 외국의 사신이 오면 이를 맞이하는 연회(宴會)에서도 성대히 거행되었다. 양주에서는 궁중 나례를 담당하던 녹번동의 연희패를 초빙하여 공연하게 하였는데 이들 산대패들이 지방 공연을 핑계로 자주 공연 약속을 어기게 되자 스스로 탈을 제작하고 연희를 익혀 자체로 공연하게 되었으며, 이를 산대(山臺)와 구별하여 별산대(別山臺)라 하였다. 이후 서울 지역의 본산대의 맥이 끊어지면서 산대놀이의 정통을 계승한 양주 별산대 놀이가 주요 무형문화재로 정착되었다.

  양주시에서는 이 별산대의 보존 계승을 위하여 공연장을 겸한 전수관을 마련하고 이를 교육과 공연의 장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지난 2011년에는 경기도 민속예술제가 이곳에서 성대히 진행되기도 하였다.

한편 이 별산대 놀이마당 한켠에는 자료관이 마련되어 있어 문화관광 해설사가 상주하며 양주별산대 놀이의 내용과 역사, 그리고 각종 탈과 의상에 관한 자세한 설명과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양주향교


  양주향교도 역시 양주관아지, 양주별산대놀이 마당과 같은 이웃에 위치한다.

  양주 향교는 조선 건국 이후 양주지역의 인재들을 교육하고 공자를 비롯한 여러 유현(儒賢)을 제사하여 문풍(文風)을 진작할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1895년에는 양주에 소학교를 설치하라는 고종황제의 칙령에 의해 이 향교를 양주소학교 건물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6.25 동란 중 향교건물 전체가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유림(儒林)의 정성을 모아 옛터에 건물을 재건하여 현재 춘추(春秋) 제향(祭享)과 옛 양주 권역인 양주시, 의정부시, 남양주시, 동두천시 유림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양주 향교에 방문하면, 수백 년 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관광객을 맞이하며, 고풍어린 건물 대성전과 동, 서재와 함께 낭랑한 송서(誦書)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회암사지


  회암사로 가려면 전철1호선 덕정역에 내려 78번 시외버스를 타야한다. 양주역에서는 회암사로 가는 교통편이 택시 밖에는 없다. 버스를 타고가다 회암사지 정류소에 내려서도 마을 안길을 1Km정도 걸어야만 조선조 최대의 국가 사찰이었던 <회암사지>에 도착한다.

  고려시대에 인도 승려 지공(指空)이 창건하고 고려 말에는 나옹(懶翁)선사가 주석하며 이 절을 중창하였다. 조선 개국 이후에는 무학(無學)대사가 머무는 한편 무학과의 유별난 인연으로 왕위에서 물러 난 조선 태조(太祖)가 거처하기도 하였다. 이후 효령대군이 이절에 정성을 들였고 문정왕후가 이절의 주지인 보우(普雨)와 함께 불교 중흥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 사후 사세가 퇴락하다가 결국 화재로 사찰 전체가 소실되고 말았다.

  회암사터에 들어가다 보면, 회암사 박물관을 볼 수 있다. 이 박물관은 회암사 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약 5,0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연구하는 곳으로 2012년 7월 중에 개관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막바지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박물관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가면 회암사지를 만난다. 현재 회암사지에 남아있는 건물은 없으나 장려한 계단(階段)과 기단(基壇) 그리고 열 지어 배치된 주춧돌(柱礎) 만으로도 거의 왕궁 규모의 어마어마했던 절의 규모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전면 좌편에 위치한 2기의 당간지주와 절터 북쪽 오른편의 부도 역시 대단한 규모를 자랑한다. 절터 안으로는 출입할 수 없으나 사지를 끼고 오르면 절터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고 이 전망대 앞에 문화관광해설사가 상두하고 있어 회암사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회암사



 

  회암사지에서 산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500m 정도 오르면 새로 지은 회암사를 만나게 된다. 물론 조선시대 회암사가 전성기를 맞이하였을 당시에는 이곳 새 회암사가 자리 잡은 지역도 역시 회암사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찰 경내에는 보물 제387호인 회암사지선각왕사비(檜巖寺址禪覺王師碑)와 보물 제389호 회암사지쌍사자석등(檜巖寺址雙獅子石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인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인 무학대사비(無學大師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 회암사지부도탑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은 다양한 유적을 만나 볼 수 있다.

  새 회암사는 회암사 옛터 일부에 자리 잡고 있어 산지 지형을 따라 건물이 배치된 고로 일반적인 사찰 건립 양식, 즉 일주문, 천왕문, 금강문, 누대, 탑, 금당, 강당이 일정한 방향을 따라 배치된 규모 있는 사찰은 아니다. 조촐한 건물들의 뒤로 언덕에 오르다보면, 지공, 나옹, 무학 세 선사의 부도와 탑비가 오랜 풍상을 견디며 고즈넉이 서 있다. 간결하고 우아한 형식의 지공과 나옹의 부도와는 달리 무학의 부도는 조선 태조의 왕사답게 구조와 조각이 화려하고 아름답다. 아울러 무학대사 부도 앞에 서있는 쌍사자 석등도 조각이 아름답고 비례가 잘 정돈된 우수 문화재이다.

 



권율장군 묘


  권율장군묘는 양주시 장흥면에 위치한다. 이곳을 찾으려면 서울 구파발에서 양주 장흥으로 오는 버스를 타거나 의정부에서 구파발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장흥에서 내려야 하나 장흥 입구에서 권율장군묘까지 포장도로로 약 3~4㎞를 더 가야하기 때문에 승용차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묘는 큰 길가 접도구역에 위치하고 있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권율장군은 이순신, 원균과 함께 임진왜란을 극복한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 3명 중 한분으로 우리에게는 행주대첩의 주인공이자, 이항복의 장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묘역에 들어서면 먼저 공의 신도비를 모신 신도비각과 재실을 만날 수 있고, 이어 산기슭을 따라 중턱까지 제법 가파른 길을 오르면 공과 두 명의 부인을 모신 3기의 무덤을 만난다. 상석과 묘전비 그리고 총각머리의 동자석을 갖춘 단아한 무덤 앞에서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헌신한 한 위인의 발자취를 확인하며 감개에 젖을 수 있다. 아울러 묘역에서 바라보는 앞산의 웅장한 경치와 울창한 숲의 정경에서 아지직도 변함없는 공의 기개를 엿보게 된다.

  한편 권율장군 묘역 일대는 양주시에서 시민을 위하여 조성한 장흥테마파크가 자리 잡고 있어 근, 현대 미술품들과 아름다운 정원, 그리고 잘 준비된 위락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어 가족들과 함께 역사 탐방은 물론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에도 적합하다.

  지금까지 양주시의 유명 역사, 문화 유적지를 살펴보았다. 양주시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문화유적지들이 여러 곳에 자리하고 있어 다양한 역사 체험을 할 수 있는 지역이다. 이와 함께 양주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문화관광해설사가 활동함으로서, 우리 문화유산 및 관광자원에 대한관심과 이해를 높이고, 기억에 남는 체험관광을 제공하고자 다방면에서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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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생태가 함께하는 구리문화기행


문아차산 일원에서 발굴된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 외에 조선조의 역대 왕릉을 비롯하여 

많은 역사유적과 설화 등이 전해내려 오고 있는 고장 아차산   -  문화관광해설사 김명희


구리시는 오랜 역사와 문화의 향기가 그윽한 고장으로 1980년대의 개발화 속에 발전된 도시이다. 서쪽으로는 아차산 ․ 망우산을 경계로 서울시 노원 ․ 중랑 ․ 광진구, 동쪽과 북쪽으로는 왕숙천을 경계로 남양주시와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그 너머에 서울시 강동구 ․ 송파구, 그리고 하남시가 있는, 삼면이 서울과 인접한 작지만 보석 같은 도심 속의 생태도시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산과 강을 끼고 비옥한 토지와 온화한 기후를 자랑하는 이곳은 선사시대 이래 우리 역사의 중심 지역 중의 하나였다. 삼국시대에는 이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백제, 고구려, 신라의 각축장이 되기도 하였으며 마한과 백제,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가 다시 백제, 신라로 이어지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아차산 일원에서 발굴된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 외에 조선조의 역대 왕릉을 비롯하여 많은 역사유적과 설화 등이 전해내려 오고 있는 고장이다.


  구리시에는 구리9景이 있다. 이 9경을 시대 별로 조화하여 답사를 계획한다면 자연을 만끽하며 과거 선조들의 세상을 엿볼 수 있는 시간여행을 알차고 멋지게 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산과 강을 함께 보며 걸을 수 있는 아차산을 중심으로 한 삼국시대의 고구려 역사문화기행, 500년 신들의 정원인 동구릉 숲과 왕숙천을 경유하는 조선의 역사생태기행, 망우묘역에서는 누구라고하면 다 알만한 교과서 속 근현대사 위인, 문학가, 화가들을 즐비하게 만나 볼 수 있다. 또한 산과 강을 품고 있어 그냥 휴식하는 기분으로 자연을 그대로 만끽하고 맛집에서 맛나게 음식을 먹고 일탈을 꿈꾸며 하루를 보내는 생태투어도 일품이다. 장자호수공원을 시작으로 흙냄새, 풀냄새,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도 있고, 자전거로 바람을 가르며 한강둔치를 통해 왕숙천에서 환경타운의 전망대에 올라 구리, 남양주시와 한강을 굽어보며 편안하게 차 한 잔의 여유를 가질 수도 있다.




역사의 흔적을 찾아가는 시간여행 - 고구려와 조선 

- 산과 강을 함께 보고 걷는 아차산 고구려 역사문화기행


  서울과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아차산은 해발 285m 

남짓 되는 야트막한 산으로 산세가 험하지 않아 구리와 인근 시민들이 가벼운 산행을 위해 자주 찾는 곳이다. 완만하고 아기자기한 등산로를 따라 30여분 걷다보면, 한강과 서울 시내를 한 눈에 담을 수 있으며, 새해 해돋이 명소로도 소문이 나있다.

  이 일대에는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루 20여개가 있는데, 발굴조사 결과 고구려 군사유적으로서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2004년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중 대표적으로 아차산 4보루와 시루봉보루가 있다. 아차산에는 오르면 고구려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된 당시의 축성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시루봉 가는 길은 완만한 오솔길에 참나무 숲으로 우거져 있어 나무 사이에 반짝이는 햇빛을 보며 그늘 속 산책하는 기분으로 산을 오를 수 있다.

  시루봉 보루에서 확 트인 한강을 바라보며 숨을 가볍게 고르고 나면 노부부 보살님이 높이 쌓은 불가사의한 관룡탑을 볼 수 있다. 또한 계곡에서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숲 속에서 풀내음과 흙냄새를 코끝으로 음미하며 야트막한 계곡에 발을 담그면 한순간에 더위를 날리며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산에서 내려오면 두부집, 돼지갈비집 등 부침개에 동동주 한잔하며 서민적인 가격으로 맛깔난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착한여행의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 아차산 ‘고구려 대장간 마을’


 

“꼭! 들러 보세요~!!

  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한 고구려의 국가발전과 성장의 동력이었던 철기문화가 고구려유적지-구리시 아차산자락에 들어선 ‘고구려 대장간마을’에서 부활하고 있어요.”

 

  고구려 대장간 마을은 대장간과 마구간, 담덕(談德·광개토대왕의 이름) 집과 촌장(村長) 집, 거물촌, 우물가 등을 갖추고 있다.

지름 7m의 대형 물레방아와 화덕 등이 설치돼 있어,

쇠를 녹이고 담금질해서 철제 무기를 생산해내는 모든 공정을 재현하는 모양의 공간으로 설계 되어있다.

이곳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일대기를 그린 TV 드라마 ‘태왕사신기’ 촬영과 선덕여왕, 쾌도 홍길동, 바람의 나라, 탐라는 도다 등 수 많은 사극이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2층 유적전시관에서는 1500년 전 고구려의 철기와, 시루와 구절판, 동이, 장항아리 등의 그릇과 농기구, 보루의 모형이 전시돼 있어 당시 고구려인의 삶을 알 수 있다. 더불어 한국을 왜 ‘코리아’라고 부르는지 그 맥락을 이해 할 수 있다.

  관람 후 역사 기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답사를 위해 2시간 정도 아차산 4보루와 연계된 산행을 하지만 가벼운 나들이를 한다면 한강둔치에서 산책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이들은 강바람에 연을 날리고 원두막에서 시원한 강바람을 쐬며 한낮의 오수를 즐겨도 좋고 가벼운 독서와 수다를 떨며 주중의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 수도 있다. 주변의 즐비한 맛집에서 식사로 입 호강까지 하면 완벽한 하루의 마무리가 된다.




- 500년 신들의 정원 동구릉과 왕이 머물다 간 왕숙천


  동구릉은 한 장소에 여러 왕릉이 조성되어 있다. 세계에 유래가 없어 2009년 6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동구릉은 조선왕조 500년의 능제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조선 최대의 왕릉 군으로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을 비롯하여 왕과 왕비 17명이 9개의 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15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오백여년 간의 조선왕조 왕릉의 형를 고루 갖춘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기도하다.

  이곳을 답사하는 동안 500년 동안 잔디 대신 억새풀로 덥힌 건원릉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수많은 왕실 이야기의 비밀을 음미하다보면, 역사적․ 문화적 가치에 경외심을 느끼며 문화의 향기를 맘껏 향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구릉의 아름다운 숲에서 왕실과 충분한 대화로 교감을 하였다면, 다음의 방향은 곤충생태관이다. 왕숙천 한강지류를 따라 강바람 타고 산책을 하며 겨울에도 나비와 곤충들을 볼 수 있는 이곳은 호기심 많은 아이들과 곤충 체험을 할 수 있다. 이후 자원회수시설의 소각장 굴뚝의 지상 100m 높이 전망대에서 한강과 주변을 둘러보고, 신재생에너지관에서 지구온난화 관련 신재생에너지는 무엇인지, 놀이와 체험을 통해 지구온난화를 공부 할 수 있다.






■ 사람.. 자연과 만나는 자연생태학습장 '장자호수공원' 과 한강둔치

 

  한 때 오폐수로 악취가 나던 장자호수공원은 장자못의 전설과 아름다은 선을 이룬 장자못의 물길 따라 산책로로 조성된 하천 제방 변에 수목을 심는 등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환경을 가꾼 결과 2005년 2월 환경부로부터 ‘자연생태 복원 우수 사례’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많은 지자제와 해외 환경단체가 벤치마킹을 위해 탐방하는 유명명소가 되었다.

  약 3만 2천 평의 면적에 3.6km의 산책로가 있어 가벼운 운동과 나들이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호수 주변 호안 잔디에 돗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가족, 또는 연인들이 모여 앉은 모습은 외국 영화 속 공원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생태체험학습장에서는 그곳에서 서식하는 곤충과 식물, 조류, 양서류들에 대해 3D영상을 볼 수 있고 생태해설사의 해설을 들을 수 있다. 주말에는 야외무대에서 각종 음악회, 전시회 등이 상설로 열린다. 장자호수 물길을 따라 산책하다보면 한강둔치로 이어지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한강을 바라보며 시원한 강바람에 자아를 맡기고 무념무상으로 일탈을 꿈꾸며 걸어보는 것도 좋다.




■ 망우산묘역과 근현대사 위인들


  봄이면 벚꽃으로 만개한 산책로, 여름에는 우거진 나무가 산책로 사이사이에 그늘을 만들어 가벼운 등산을 즐기기 위해 찾는 시민들의 쉼터로 소문나있다. 그러나 망우산은 역사의 기록에 큰 발자국을 뚜렷이 남긴 근현대사 위인들을 만날 수 있는 역사명소이다.

  3·1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만해 한용운, 독립운동가이면서 서예가이고 언론가이신 위창 오세창, 아동문학가이면서 어린이날을 만드신 소파 방정환, 국어학자이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종두법을 시행한 송촌 지석영, ‘소’의 그림으로 친숙한 화가 이중섭, 30살 젊은 나이에 요절한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 등 유명 근현대사 위인들의 묘소가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묘도 이장하기 전에는 당초 이곳 망우리였다. 즉 망우산은 교과서에 등장하는 근현대사의 위인, 문학가, 화가들을 즐비하게 만나 볼 수 있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나라사랑과 근대사 위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

  구리는 어린이들에게는 역사의 장으로, 어른들에게는 휴식을 만끽할 수 있는 웰빙 여행지로 안성맞춤이다. 다양한 역사와 생태가 함께하는 구리로 이번 여름휴가를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Posted by 경기도문화원연합회

문화원 지킴이 “따르릉 어르신 동요합창단”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르릉,

저기가는 저사람 비켜가세요 우물쭈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어렸을 적, 누구나 한번쯤은 불러봤을 노래 ‘자전거’의 가사이다. 예전에는 흔하게 들을 수 있었던 동요들이 이제는 다른 장르의 음악에 밀려 듣기 어렵다. 어린 아이들은 동요가 아닌 대중가요를 더 많이 부르며, 많은 수의 합창단은 유명 작곡가들의 곡 혹은 예술적 가치가 높게 평가된 곡들을 더 선호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동요를 알리고자 힘쓰는 합창단이 있으니 부천문화원의 ‘따르릉 어르신 동요합창단’이다.



2009년 부천문화원의 어르신문화학교 사업 중 하나로 시작된 ‘따르릉 어르신 동요합창단’은 60세 이상의 부천문화원 여성회원들로 구성된 동아리이다. ‘부천 따르릉 여고 합창단’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림 법한 이 합창단은 만4년이라는 시간동안 다양한 행사 및 지역축제 등에 참가하고 있으며, 더불어 문화 나눔 봉사활동을 통해 재능기부에 앞장서고 있다. 同心同德(동심동덕), 같은 목표를 위해 하나 된 마음으로 합창단에 참여하고 있는 40여명의 회원들과 그들을 이끄는 추응운 선생의 유쾌 발랄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최순희)

● 따르릉 어르신 동요합창단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신가요?


최순희:예전에 부천문화원에서 교수님들이나 유명 강사님들을 초대해서 세미나를 열어 주셨습니다. 약 3개월 동안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추응운 교수님의 동요 세미나를 듣게 되었어요. 동요 ‘반달’을 같이 부르는데, 가슴이 찡하면서 ‘아, 이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동요합창단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행히 문화원의 협력과 지원으로 2009년 40여명의 회원들이 모여 일주일에 2번씩 어렸을 적 불렀던 동요들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저희들이 갈고 닦은 실력으로 봉사를 나가고, 정기연주회도 열게 되었죠. 개인적으로 이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제 삶이 바뀌고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어 너무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강신자)

● 요즘은 어린아이들조차도 동요보다는 대중가요를 많이 부르잖아요. 동요를 배울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요를 부르는 이유, 동요에 좋은 점은 무엇일까요?


강신자:만약 누군가 왜 예술성 높은 음악이 아닌 동요를 부르냐고 묻는다면, 동요가 갖는 순수성이 저희들과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어요. 정서적인 부분에 있어서 잘 맞는 거죠. 사실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유명 작곡가들의 곡을 듣는다고 모두가 그 곡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음악적 지식이 부족하면 왠지 듣기 꺼려지는 부분도 있고요. 그렇지만 동요는 그런 게 없어요. 어린아이들도 거부감 없이 들을 수 있는 거죠. 동요가 갖는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연지숙)

● 연세를 생각했을 때 오랜 시간 노래를 부르고 공연을 준비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어떤 점이 어려우신가요?


□ 연지숙:정년 후에 또 다른 인생의 즐거움을 찾고 싶어 이 합창단에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동요를 부르다 보니 옛날 회상도 하게 되고, 마음과 정신이 젊어져 가는 거 같아서 힘든 건 느끼지 못하겠더라고요. 물론 힘들 때도 있지만 동요를 흥얼거리다 보면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아서 괜찮은 것 같아요. 왜 그럴까 생각해 봤는데, 가사와 멜로디가 너무 예쁘잖아요. 신이 주신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 강신자:가끔은 공연 때문에 악보를 외워야 하는 상황이 생기잖아요. 이런 건 좀 어려운 것 같기도 해요. 아무래도 나이가 들다보니 무언가를 외워야 한다는 것에 어려움이 생기는 거야 당연한 것이겠죠. 그래서 일부러 시간 내서 꼭 연습을 해요. 항상 흥얼거려야만 가사를 좀 더 쉽게 외울 수 있거든요. 







(추응운)

● 지휘자님께 질문 드리고 싶어요. 오랜 시간 소년소녀 합창단에서 지도를 해오셨는데, ‘따르릉 어르신 합창단’과 연령대가 많이 달라서 지도방법 등에서 다른 점이 있을 것 같아요.


 추응운:제 생각에는 따르릉 합창단과 소년소녀 합창단은 여러면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나이만 다를 뿐이지 너무 비슷해요. 그렇다보니 레퍼토리도 비슷하고, 언제나 시간 가는지 모르게 연습하는 것 같아요. 보람도 많이 느끼고요. 작년에 대부도의 한 초등학교 합창단과 음악회를 통해 서로 음악을 교류했는데, 적응을 너무 잘하셔서 학생들도 너무 좋아했어요. 우선은 회원들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하니까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다들 저를 너무 좋아해주세요. 저 때문에 합창단 하겠다는 분들도 있고... 항상 웃을 일만 있을 수 있게 많이들 도와주시니까 오히려 더 편한 것 같아요.





● 만 4년 동안 이미 많은 공연을 하셨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을 것 같아요.


 이정열:소록도 공연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오빠생각과 같은 옛날 동요를 불렀는데, 다들 난리가 났었어요. 저희 공연 직전에 유명한 가수가 와서 공연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분 공연보다 저희 공연을 더 좋아했다고 들었어요. 그분들이 어찌나 고마워하시는지... 저희는 공연 하는 것을 너무 좋아해요. 날짜가 잡히면, 단 한 명 낙오되는 사람 없이 40명 모두 하나 된 마음으로 같이 공연을 준비해요. 만약 누구 하나 ‘저 못해요’라고 말하면, 준비하는 사람들이 지칠 수 있는데, 다들 긍정적이다 보니 서로들 너무 좋은 것 같아요. 만약 우울한 일만 있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저희와 함께했으면 좋겠어요. 정말 기분 좋게 사실 수 있을 것입니다.



● 앞으로 해보고 싶은 공연이 있으실까요?


 김성자 워낙 교수님께서 좋은 공연에 설 수 있도록 도움을 많이 주시다보니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앞으로는 노래와 더불어 회원들이 악기를 배워서 함께 공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하모니카나 리코더 같은 악기를 같이 하면 좋잖아요. 지금도 무용 같은 것은 함께 보여주고 있어요.




● ‘따르릉 어르신 합창단’에서 활동하니 이런 점은 정말 좋더라!라고 생각하는 것 있으신가요?


 김성자:마음이 고와지고 건강해지고, 맑은 영혼을 가질 수 있는 것 같아요. 제일 좋은 것은 여고생 시절에 불렀던 노래를 다시 한 번 부를 수 있다는 것 같아요. 노래만 부르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도 여고생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거든요.


 최순희:우선 지휘자님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지휘자님께서 저희들 눈높이에 맞춰서 가르쳐주시니까 너무 좋아요. 여고생 시절에 총각 선생님 한 분이라도 학교에 계시면 많은 학생들이 정말 마음 설레 했잖아요. 저희 지휘자님을 바라보면 그런 마음이 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더 잘 따르게 되는 것 같고요.


 강신자:합창단 활동을 통해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점 같아요. 공연을 통해 봉사도 나가지만, 유치원에 봉사활동도 나가고 있어요. 거기서 아이들에게 전래동요 같은 거 가르쳐 주면 아이들이 너무나도 좋아해요. 우리나라 동요를 살펴보면 가사가 우리 생활에 접목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더 정확히 배우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이정열)

● 문화원 활동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고, 교육도 받지만 가끔 이런 점은 좀 아쉽다고 생각하시는 게 있으실 것 같아요.


 추응운:정원에 제한을 두는 것이 조금 아쉬워요. 사실 저희도 40명까지만 받고 있는데, 정원에 제한을 두다 보니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생기거든요. 그리고 다른 지역의 여러 문화원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도록 좋은 프로그램들은 확산되었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경기도 문화원 내 실버합창단은 2~3개 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나중에 10개 이상으로 그 수가 늘어난다면, 서로 한자리에 모여 기량을 뽐낼 수도 있고, 서로 정보를 나눌 수도 있잖아요. 나중에 혹시 기회가 된다면 KBS ‘아침마당’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노래도 부르고 한국에 이런 합창단도 활동하고 있다는 거 보여주면서 한국에 실버 합창단이 정착할 수 있도록 문화원들이 그 역할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김성자)

●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이야기 있으신가요?


 이정열:저희는 항상 기대를 해요. 물론 저희는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한명한명 따지면 좋은 실력을 갖추고 있지는 못할지도 몰라요. 그러나 여러 사람이 모였을 때 내뿜는 힘은 엄청난 거 같아요. 저희가 좀 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는 따르릉 어르신합창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경기도문화원연합회

문화원에 전하는 진 솔 한 이야기


강진갑(경기문화재단 문화협력실장)


2012년 한국문화원연합회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였다. 50년 세월 속에 전국에는 200여개가 넘는 문화원이 생겨나면서, 지역문화계의 발전, 넓게는 한국문화계 발전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왔다. 경기도 역시 31개 시군 문화원을 통해 경기도민들이 좀 더 문화인으로서 성장하고,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펼쳐 왔으나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 경기도 내 문화원의 현모습, 그리고 미래를 현재 경기도 문화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는 경기문화재단의 강진갑 실장을 통해 문화원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 경기문화재단에서 오랜 시간 활동하였지만 문화원과도 지속적인 관계를 가져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문화원과 어떠한 활동을 해오셨나요?


□ 지역 문화 활동을 문화원에서 처음 시작하였습니다. 1989년 용인문화원으로부터 용인군지 편찬 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위촉되면서 문화원과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이후 양주군지 편찬위원회 상임위원, 양주군지명유래집 편찬위원회 상임위원, 파주군지 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을 맡으면서 경기지역사, 그리고 지역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1994년 경기도사 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을 맡게 되었고, 기존의 경기도사 편찬계획을 수정하여 32,000쪽, 40권 분량의 경기도사 와 경기도사 자료집 편찬 10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워낙 양이 방대하여 주변에서 불가능하다고 하였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1995년 7월 새로 부임한 이인제 지사가 경기도 역사의 재조명을 강조하였기에 본격적인 편찬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계획에 따라 경기도사 를 편찬하다가, 1997년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마무리를 함께하지는 못했습니다만, 남아있던 상임위원들에 의해 15년의 세월동안 40권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경기도사 와 경기도사 자료집 이 발간되었습니다.

  경기도사 편찬위원회 재직 당시 전국 대부분의 광역자치단체 단위에는 광역 단위의 향토사연구협의회가 있었는데 경기도에는 없었기에 1996년, 경기대 최홍규 교수, 리제재 선생, 김종기 수원문화원장과 함께 경기도 향토사연구협의회를 조직하여 총무이사를 맡기도 하였습니다.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는 전통문화 진흥 업무를 맡았습니다. 업무상 자연스럽게 문화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문화원과 여러 가지 일을 하였습니다. 경기문화재단에 잠시 퇴직해있던 기간에도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일하면서 경기도 내 3, 4개의 문화원 활동에 참여하였고, 한국문화원연합회 에서도 자문위원 등의 활동을 하였습니다. 2011년 3월 경기문화재단 문화협력실장 겸 경기학연구실장으로 재입사한 후에도 문화원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 지명유래집이나 군지 편찬에 대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화원 내 이러한 것에 대한 편찬을 계획하고자 있는 문화원, 편찬위원들 혹은 담당자들에게 전할 수 있는 포인트나 노하우는 무엇이 있을까요?


□ 시,군지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군지가 처음 편찬될 당시에는 각 지역에 이것을 연구하는 전문 인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 전문가들이 시군지 편찬 업무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지요. 제가 상임위원을 맡아 발간한 몇몇 지역의 군지 역시 다른 분들이 상임위원을 맡았다가 편찬에 문제가 생겨 중도에 제가 맡게 된 경우가 있습니다. 지역사 연구는 다른 지역과의 비교 연구가 중요한데 연구 역량이 부족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특정한 역사적 사실을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여럿 있었습니다. 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이 지역문화를 발굴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역사와 지역 문화를 제대로 연구하고 평가하였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이것 1980년대 중반까지의 현상입니다. 

  1980년대 말부터는 향토문화 협의회 같은 단체들이 만들어지면서 전문가들이 향토지 편찬에 참여하였고, 시·군지의 수준도 많이 올라갑니다. 전문 학자들이 지역사地域史연구에 투입되고, 집필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시·군지의 학문적 수준이 질적·양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것이지요.지금 시대에 있어 시·군지 편찬 스타일은 이전의 것과는 달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시군지는 너무 두꺼울 뿐만 아니라 내용도 딱딱합니다. 그러다보니 시군지는 발간·배포되는 즉시 서가로 직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시군지는 서가에 꽂아 두는 책이 아닌 손에 들고 다니며 보는 책으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시군지를 본편本篇과 자료편으로 나누어, 본편은 연구자 뿐 아니라 지역 주민이면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책으로 만들어야 하고, 여러 권으로 나누어 두껍지 않게 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자료편의 경우에는 종이책보다는 디지털화하여 전자책으로 서비스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예산도 절감하고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시군지 편찬위윈회를 상설 기구로 만듦으로서 중장기 계획에 의해 체계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그 성과를 내 놓아야 합니다.




● 일찌감치 디지털시대의 콘텐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동료 학자들과 인문콘텐츠학회를 조직하셨습니다. 문화원 역시 문화원형을 콘텐츠화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요?


□ 1990년대 말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디지털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문학·철학·역사는 문자를 바탕으로 성립된 학문이지만, 디지털시대의 소통 수단은 이미지입니다. 사람들은 문자보다 이미지로 소통하기를 원합니다. 당시 이러한 지식체계의 변화가 인문학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하는데, 저는 위기가 아닌,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1989년 12월 개최되었던 전국 향토사학술회의 개최 실무를 담당하면서 학술대회 주제를 정

보화시대 향토사 연구 로 잡았습니다. 당시 반대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불과 몇 달 만에 그러한 주제가 선정되는 것에 동의하였습니다. 시대가 그 만큼 빨리 변화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죠.

  2002년 초 교수로 있는 친구 두 명과 술을 마시다가 인문콘텐츠학회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건국대 김기덕 교수를 중심으로 빠르게 협회를 구성해 나갔지요. 학회 창립 후 부회장과 편집위원장을 지내다가 2010년 말 학회장으로 선출되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콘텐츠라는 단어는 내용물을 의미합니다. 디지털과 결합된 다양한 결과물들이 나타나면서 콘텐츠라는 말이 우리사회에 유행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지금은 콘텐츠 개념이 확산되어 문화유산, 테마 파크, 공연 등에서도 콘텐츠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문화원 입장에서는 전통문화 연구 결과물을 콘텐츠로 활용 하는데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전통문화를 콘텐츠화 할 때, 문화원은 소재를 연구, 발굴하는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만, 이를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데는 그리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반면 예술인들은 하나의 원형을 작품화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발굴하는 힘은 부족합니다. 이는 곧, 지역의 문화원형을 발굴하고 콘텐츠화 하는 과정이 예술단체와의 적극적인 협력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한국사회의 변화와 비교했을 때 문화원들은 그 흐름을 제대로 읽고 있는가? 라는 고민을 할 때가 많습니다. 어떠한 형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 문화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문화예술 기관, 단체가 한국사회에서 자기 역할에 맞는 변화를 꾀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문화원의 경우에는 재원의 대부분을 공공 재원에 의존하다 보니 여러 면에서 한계를 보입니다. 문화원에서 다양한 사업을 펼치기는 하지만, 돈도 모자라고 사람도 부족합니다.

  예술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공공영역 밖의 문화예술단체들은 정말 치열하게 일을 합니다. 시장에 적응 못하면 문을 닫아야 하니까요. 자연스레 시장의 요구,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게 되지요. 그러나 문화원은 상업화된 시장을 대상으로 사업 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 변화에 둔감한 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문화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재단이나 예총처럼 공공재원에 의존하여 사업을 하는 기관이나 단체의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공 재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현재의 체제에서 탈피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문화원은 회원들의 회비나, 임원진들의 후원을 늘려 나가야 합니다. 원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원장이라는 자리는 명예직이 아닙니다. 이전에는 돈이 있거나 권력에 가까운 분들이 원장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문화예술발전에 큰 뜻을 펼치고자 하는 분들이 문화원장 직을 맡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원장은 돈을 끌어와야 합니다. 민간과 기업에서 기부와 후원을 받아 와야지요. 사업은 사무국에 맡기면 문화원은 원활히 운영 될 것입니다.




● 문화원 내 필요한 조언을 해 주신다면....


□ 문화원 직원들을 위한 교육을 확대해야 합니다. 문화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단체가 직원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합니다.

  지금의 아이디어와 지식으로는 변하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5, 10년 후를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의 생각으로 미래를 준비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원은 직원 교육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 한국문화를 문화원이 앞장서서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 화재단이 존재하기 이전에는 문화원들이 그 역할을 담당했으나, 지금은 경기도 대부분의 시,군에 문화재단이 있어문화원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작아졌습니다. 

어떠한 파트너십 관계를 구축해 나가야 할까요?


□ 문화재단은 문화원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예술단체와 파트너십 관계를 가져야만 합니다. 문화재단과 문화원은 특히 특별한 파트너십을 가질 수 있는데, 첫째는 전통문화와 관련된 것으로 문화원이 전통 문화 소재를 발굴, 보존하면 문화재단에서 이를 콘텐츠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외에도 문화원의 소외계층이나 다문화 가정을 위한 사업, 또는 직원교육사업 등을 문화재단이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겠죠. 좋은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지원을 안 할 이유는 없습니다. 앞으로 문화재단이 해야 할 지원과 역할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설 것입니다.




● 경기문화재단 문화협력실장과 경기학연구실장 직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꼭 실현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 경기도 내 많은 예술인들이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과 경기도민들이 문화시민으로서 예술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돕는 것,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것, 그리고 예술 교육의 확산, 문화 소외계층을 위한 바우처 사업 등이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저는 지나간 역사와 다가 올 미래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요사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일이 역사문화자원을 콘텐츠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삼남길 조성사업도 그 중 하나입니다. 2014년은 경기 정립 600년이 되는 해이고, 2018년은 경기라는 행정구역이 만들어진지 천년이 되는 해입니다.

  현재 경기문화재단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중에 있으며, 이 중 하나로 경기도내 역사문화자원을 체계적으로 발굴하고 이를 콘텐츠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역사에서 경기 라는 행정 구역이 처음 생긴 것은 고려시대입니다. 이는 918년 개성 주변을 경기라는 행정구역으로 설정한 것으로 경기 천년 사업은 개성과 수원을 연결하는 남북협력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기도사 편찬을 재개하는 것도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전의 방식이 아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경기도 역사책으로 출판사와의 연계를 통해 예산도 절감하고 독서 시장에서도 읽히는 경기도 역사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저는 문화예술인들이 앞으로의 미래 사회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디지털 기술이 세상의 정치 사회 구조는 물론이고 지식체계와 문화예술의 근간까지도 바꾸어 놓고 있기에 과학기술이 문화 예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죠.

  금년에 경기문화재단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을 소재로 하는 예술 프로젝트를 하나 추진했는데 생각만큼 잘 추진되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예산 부족도 이유였지만, 문화예술인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과학자들은 문화예술을 잘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융합의 시대에 융합이 되지 않는 것이지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갈수록 문화 분야에서 공공재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문화분야의 가치를 세상 사람들에게 인식시켜 문화 분야에 대한 공공의 투자가 늘어나도록 유인해야겠지요.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적극적으로 후원을 유치하고 민간의 기부를 유도함으로서 자립 기반을 지금보다 확보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과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문화원에 전하는 마지막 한마디....


□ 문화원이 미래의 한국 문화를 이끌어 가는 문화기관이 되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비전을 세우고 이를 실현해 나가야 겠지요. 그리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문화원으로 많이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사무국 직원을 늘리는 것은 예산상의 어려움이 있으니 전문가들이 재능기부 차원에서 참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는 것도 사람을 모으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문화원 구성원이 다양했으면 합니다. 예를 들어 20대 청년 이사진이 문화원에 존재한다면, 변화하는 세상에 감각있게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청년들이 찾고 활동하는 문화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레 문화원의 영역이 넓어지고, 문화원의 위상도 높아지겠지요.


 

  그는 항상 웃는다. 웃는 얼굴에 가려 보기는 힘들지만,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눠 보면 그의 눈이 참 깊다.

  지난 세월 문화원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는 것이 반가운 일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누구보다 문화원의 깊은 속사정을 잘아는 사람이기에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는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명확한 구분을 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히려 문화원의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된 좋은 시간이었다.



Posted by 경기도문화원연합회

10년지기 문화원



가평문화원 신미숙

양평문화원 김영희

화성문화원 김숙이



지식인의 대명사 네이버 에서 文化院 을 검색하면 문화원은 한 사회에서 이루어진 문화를 한눈에 접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공간 이라고 알려준다. 그렇다면 지역문화원들은 그 지역의 문화를 한 눈에 접할 수 있는 곳인가. 함부로 장담하건대, 그 지역의 문화를 알려면 문화원 서고에서 자료를 찾는 것보다 문화원 임직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빠를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화성의 옛날 마을 모습이 궁금한가. 그럼 화성문화원의 김숙이 과장에게 문의해라. 김숙이 과장은 화성문화원 발간 저널 문화의 뜰 기획 기사로 화성에서 아직 도시화되지 않은 마을 소개를 위해 화성 여기저기를 직접 찾아다닌다. 옛날 사람들은 양평에서 서울까지 배로 어떻게 이동했는지 궁금한가. 양평문화원의 김영희 과장을 찾아라. 김영희 과장은 양평의 문화 역사에 관련된 회원들의 문의에 정확한 답을 하기 위해 직접 옛날 자료를 찾고, 지역 어르신들에게 물으며 양평의 전문가가 되었다. 가평의 볼거리, 먹거리가 궁금한가. 가평문화원의 신미숙 간사에게 전화해라. 가평의 신미숙 

간사는 가평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로 숨어 있는 맛집, 친절한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펜션, 남이섬 주차장이 만차일 때 인근의 주차구역 등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없는 사사로운 하지만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다.





● 문화원에 어떻게 입사하게 되셨어요?


□ 화성 김숙이  제가 다른 사회단체에서 일을 했었어요. 지금 문화원

건물로 이사 오기 전에 제가 일했던 사회단체랑 문화원이 같은 건물

에 있었어요. 그래서 문화원 직원들과는 친분이 있었어요.

  문화원이 이사가고 난 후 어느 날 원장님이 놀러오셔서 그 단체장

님과 말씀을 나누시는데, 문화원 직원 한 명이 갑자기 그만 둬서 직

원 채용한다고 하시는거예요. 그땐 말도 잘 못하고 숫기도 없었는데,

원장님 가시기 전에 ‘제가 이력서 내봐도 될까요?’하고 여줬더니

흔쾌히 그래라 하셨어요.

  면접을 보고 원장님이 좋다고 하셨고 여러 가지 상황에서 그 사회

단체보다는 문화원이 좀 더 나은 환경이라 옮겼어요. 2001년에 입사

                                           한 후, 이런 저런 상황에 원장님 네 분을 모셨어요.


양평 김영희 저는 96년에 입사했어요. 문화원이 첫 직장이에요. 아는 분이 그 당시 원장님이랑 친구셨는데, 공무원 시험 준비하면서 가볍게 다니라고 하셔서 그냥 입사했었어요. 그런데 문화원 일이 가볍게 다니면서 할 일이 아니잖아요. 어느 순간 공부는 뒷전이고 문화원 일을 열심히 하다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15년이 지났네요. 처음엔 회원들이니 외부에 전화 하는 것, 받는 것도 참 어려웠었는데 이젠 문화원에서 왠만한 일은 다 겪어본 거 같아요.


□ 가평 신미숙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에 IMF탓에 경기가 너무 안 좋으니 번듯한 직장엔 취업이 잘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아르바이트삼아 급하게 큰 음식점에서 일을 시작했었어요. 그런데 너무 힘들더라구요. 한 달을 겨우 채우고는 그만두고 집 에 있는데, 담임선생님께 연락이 왔어요. 집에 있으면 한 번 가보라고 추천해 주신 곳이 문화원이었어요. 처음엔 문화원이 뭐하는 곳 인지도 모르고 일하러 왔었어요. 인수인계 받는 동안엔 월급이 너무 적어서 집에서 문화원까지 걸어서 다녔어요. 아~정말 추워서 눈물이 날 정도였어요.





● 문화원은 어떤 곳일까요?


□ 양평 김영희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 지식인?!

  양평 문화, 역사에 관련된 온갖 문의전화가 와요.

  얼마 전에는 어떤 분이 정확하지 않아도 좋으니 양평에서 양수리

두물머리까지 배로 가면 몇 리냐고 물어봤어요. 문화원에서 알려주

는 건데 되도록 정확히 알려줘야 하잖아요. 서고에 가서 군지를 뒤

지는데 잘 못 찾겠는거에요. 그러다 예전 국장님께서 역사에 해박하

셨던 기억이 나서 국장님께 답을 구했었죠.

  양평 문화 관련 단체에 대해 묻는 전화도 많이 와요.

  한 번은 모르는 단체에 대해 물어봐서 지역 문화 단체들이 문화

원에 등록하는 것도, 문화원에서 관리하는 것도 아니라 문의하신 내

용은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왜 모르냐고 세금받고 일하면 알아야하

는 거 아니냐며 항의 받은 적이 있었어요. 모르는 내용이면 자료를

찾고 지인들에게 연락해가며 최선을 다해서 조사하고 정확한 정보

를 알려드리려고 노력하는데 이런 항의 받을 때면 속상해요

  아! 그래도 한 번은 군청 홈페이지에‘칭찬합니다’에 글 올라

왔었어요.


□ 화성 김숙이 맞아요. 화성은 어르신들이 길 가다가 안내판이나 표석에서 잘못된 내용을 발견하시면 문화원으로 전화하세요. 옛날 마을 이름을 한자로 옮기면서 발음과 표기음이 달라진 지명이 있나봐요. 어느 어르신께서“내가 여기서 몇 년을 살았는데, 이 동네 사람들에게 다 물어봐라. 이거 발음이 안 맞는 한자다”라고 하셔서 그 안내판은 시청으로 문의하셔야한다고 안내했는데 그래도 문화원에서 다 알아야하는 게 아니냐며 말씀하시더라구요. 회원들은 문화원이 무엇이든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 가평 신미숙 지역문화원은 그 지역의 120 콜센터가 되어야 하나봐요. 향토사, 문화와 관련되지 않은 문의도 많이 와요. 가평은 잣이 특산물이잖아요. 잣이 워낙 비싸니까 잣을 조금이나마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매장에 대한 문의 전화도 와요. 우리 주최도 아닌데 자라섬 페스티벌 티켓 어디서 구하냐고도 묻고요. 그래도 그런 문의에 답하느라 하나씩 알게 되는 건 있으니까 좋아요.

□ 화성 김숙이 문화학교 강좌가 많은 날에는 정신이 없어요. 첫 번째 강사 한 분과 대화를 하다보면, 회원이 오세요. 그럼 강사는 가신다고 자리를 뜨고 회원님과 대화를 하죠. 그러다보면 다른 회원님이 오세요. 그럼 대화를 나누던 회원님은“나 갈게.”하고 일어나시고 다른 회원님과 대화를 하게 되죠. 그러다 다른 강사와 대화를 하게 되고... 때로는 6시 이후에 낮에 못한 행정 업무를 해야하니까 힘들기는 하는데, 문화원에서는 사람들과 항상 교감할 수 있어요. 문화를 하는 사람이 지역민들과 교감하는 것이 기획의 첫 번째 일인 것 같아요.




● 원장님 자랑 딱 하나씩만!!


□ 화성 김숙이 직원들의 의견을 잘 경청해주세요. 제가 문화원에서 오래 일을 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문화원 운영에 관해서 의견물으시고, 직원의 입장에서 같이 생각해주세요.


□ 양평 김영희 역시나 저희 원장님도 직원들의 입장에서 많이 생각해주세요. 직원들 연봉 인상에도 신경써주시고요. 다들 아시다시피 문화원사 건립에 10억을 기부해주셨잖아요. 덕분에 꿈에 그리던 독립 문화원사로 얼마 전에 이사를 했어요.개인적으로는 원장님께서 제 결혼식 때 주례를 서 주셨어요. 주례사 한 문장, 한 문장이 저와 관련된 내용이라 ‘아~ 저를 관심 갖고 지켜봐주셨구나’ 싶어서 더 큰 감동 받았어요. 올 초에 원장님 건강이 안 좋으셔서 걱정 많이 했는데, 그래도 개관식 때 건강한 모습으로 인사말 하시는 모습 뵈니까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 가평 신미숙 저희 원장님도 저에 대해 배려 많이 해주세요. 저희는 직원이 국장님과 저, 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잠깐 은행에 갈 때도 신경 쓰이고는 했었어요. 임신으로 병원을 자주 가게 되는데 원장님께서 마음 편히 병원 다니게끔 따뜻하게 배려 해 주시더라구요.더불어 국장님도 걱정 많이 해주시고 도와주세요.



문화원에서 일을 하려면 무엇을 잘 해야 할까요?


아침에 출근해서 사무실 청소 잘 해야지

손님들에게 커피도 맛나게 잘 타드려야지

행정도 해야 하고

다른 곳보다 문화기획도 잘 해야 하고

문화원을 믿고 지지해주시는 회원 관리도 해야 하고

우리 지역 향토사도 알아야지

답사도 다녀야 하니까 체력도 좋아야하고


문화원에서 일을 잘 하려면 만능 엔터테인먼트가 되야해요. 그런데 열심히 하다보니 만능 엔터테인먼트가 되는 것 같아요. 일은 하나씩 배우게 되고, 사람을 많이 만나다보니 성격도 바뀌고요.



Posted by 경기도문화원연합회



작게는 지역민이지만, 큰 틀에서는 결국

문화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용인문화원 김장호 원장


지방문화원장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지역의 문화적 현주소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

다. 그렇다면 지방문화원원장이 진단하는 현재 문화상황은 어떠하며, 그러한 문화적 상황에서 지역문화에 대한 현주

소를 읽을 수 있는 단초를 제공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차원에서 기획된 인터뷰이다.


첫 만남은 따뜻한 녹차와 함께 곁들인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용인시는 본래 용구현과 처인현이 합치고 용구에서‘용 자와 처인의‘인 자가 합쳐 용인

현으로 칭하다가 후에 양지군을 합쳐 오늘의 용인시가 되었습니다. 인구는 현재 약 92만명이에요.”

용인문화원이 무엇을 하려하고,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한 번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역을

알고, 앎을 통해서 사랑하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고민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 갑작스러운 질문부터 시작해서 죄송합니다만, 문화원장이 되시면서 이것만은 내가 재임 중에 꼭    하고싶다 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  직원 처우문제입니다. 경기도 문화원 직원들의 처우는 정말 제일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직원들이 너무 자주 바뀝니다. 처우문제도 문제지만, 업무의 연속성을 만들어 가기가 너무 힘듭니다.

  우리가 사업을 구상하고 추진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 중 하나가 바로 ‘지속 가능한 사업’ 아니겠

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직원들이 자주 바뀌면 어떻게 그 것이 가능하겠어요. 특히 문화원의 사무국장은 그 문화원의 사업의 성격 및 기획을 책임지고 있는 실무 총 책임자인데, 사무국장의 교체가 잦으면 그 문화원의 성격 또한 자주 변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새로 들어온

직원의 능력 문제일 수 있지만, 그동안 해오던 노하우를 살려서 갈 수 없잖아요. 항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능력 있는 직원인프라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물론 그에 따른 처우도 해 줘야 합니다. 좋은 직

원을 뽑고, 그 직원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일한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주고, 문화원 차원에서 끊임없이 자기 개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면 금방 바뀝니다. 문화원장이 해야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무엇인가요?


□  1986년 무역회사를 운영할 때 고려대 최고경영자 과정을 했습니다. 그때 교수들에게 들은 겸손과 배려에 대한 강의가 내가 꽤 큰 충격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내 인생지표가 될 만한 것을 많이 얻었고, 살아온 삶에 대한 반성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삶에 대한 지향이 싹튼 것 같습니다.젊었을 때의 터닝 포인트도 잊을 수 없죠. 고등학교때 배구선수로 활동했었습니다.그때 받은 상 가운데 ‘명예규정상’ 이라는 것이 있는

데 이 상은 육군사관학교에서 주는 상으로, 운동만 잘해서 주는 상이 아니라, 모든 부문에서 우수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었죠. 공부는 물론이고, 체력, 품행 등 까다로운심사기준에 부합되어야만 받을 수 있는 상인데,   지금까지 받은 상중에서 제게는 가장 의미 있는 상이고, 그 때 받은 이후로 내 삶의 방향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또 하나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도 있습니다. 바로 1970년대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 전국에 중학교를 설립할 때 제가 용인지역에 재건중학교를 설립했던 거죠. 제가 졸업시킨 학생이 680명이었어요. 70년대 당시에는 일반중학교보다 재건중학교에 와서 배우는 학생이 더 많았어요. 보람도 많았고, 힘들었지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 문화원장으로서 용인문화원이 이렇게 되어야 하지않을까? 라는 나름의 포부가 있으실 텐데... 몇 말씀 듣고 싶습니다.


□  15년 전 용인시의원을 마치고 용인문화 발전에 뭔가 를 해야겠다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재건중학교를 운영할 당시의 일이었는데요. 당시 충분한 지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사재를 털기도 하고, 때로 는 여러 곳에 지원을 받아 근근이 운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노트와 연필이 없어서 굉장히 곤란할때가 있었는데, 당시 문화원 총무로 근무하고 있던 강명윤(지금은 작고하셨지만, 아직도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씨가 기증해 주셨어요. 그때 가슴 시리도록 고마웠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그 때의 진한 기억이 지금 내가 문화원장으로 용인문화원에서 일하게 된 계기가 아닌가 싶습니다.문화원장으로 오기 이전에 문화원 이사로 있으면서행사 때마다 준비위원으로 나만큼 많이 참여하고 함께시간과 정성을 들인 사람도 없었을 겁니다. 물론 당시에는 이사님들이나 직원 수, 예산 등 전체적으로 체계가 안잡혀 있을 때이기도 했어요. 감사와 부원장을 거쳐 지금 문화원장을 하고 있는데,당시 문화원 시스템을 정교화 하는데 많은 노력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 시스템의 정교화라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 몇 가지 정리해서 말하자면, 적어도 그 기간(감사, 부원장으로 재직할 당시)동안 용인문화원 정관 및 관련 규정을 정비했습니다. 용인문화원의 조례 및 규정만큼 잘되어 있는 곳도 없을 겁니다.




● 용인문화원이 이것만큼은 참 잘한다는 것이 있을 텐데요.


□  예! 참 많습니다. 먼저 <찾아가는 향토사 교육>이라는 사업입니다. 용인 시내 30개 초등학교 3학년 교과과정과 연계하여 실시하고 있어요. 교육청과 MOU도 체결한 상태입니다.

 현재 주5일제 도입 이후 토요프로그램으로 운영 전환에 대한 고민도 하고 있어요. 또한 예능교육과 함께

향토사 교육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있어 내년부터 시행할 예정입니다. 지금은 3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전 학년 대상으로 확대 운영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기관과의 사업 연계를 강화하고 네트워킹 하는 일이 있습니다.

  2011년에는 용인경찰서와의 MOU체결로 경찰서장, 전투경찰, 의경, 경찰 직원에게 향토문화교육을,     2012년에는 육군 제55사단과의 MOU체결 군인들에게 향토문화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또 굉장히 가슴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이 사업은 경기도 31개 시,군 문화원이 함께 추진해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2012년 6월 28일, 용인시 문화발전과 죽전관리역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서를 체결했죠. 용인문화원과 코레일(한국철도공사 죽전관리역)이 체결했는데, ‘죽전관리역’이라는 것이 14개 역사를 관할하고 있는 시스템을 말합니다. 이곳을 용인시민이 이용하는 문화공간으로 조성하여, 공연장, 전시공간을 조성해 보려고 합니다. 구체적인 사업명은 <역사를 활용한 문화거점 조성을 위한 사업>으로 현재 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 중점사업은 무엇인가요?


□  용인에는 2000여명이나 되는 공무원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문화원에서 개발하고 기획한 시민문화대학을 수

료하게 하고, 그것이 경력사항으로 인정될 수 있도록 긴밀하게 시와 협의 중에 있습니다.

  적어도 용인 지역에 있는 역사뿐만 아니라 문화적인소양을 공무원들이 갖춰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

해 현재 다양한 역사자료를 개발하고 있는데, 대표적인것이 <소책자 발간>입니다. 그동안 문화원에서 발간한 책을 보면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학술서적 위주였습니다만, 과감하게 조정해서 분량도 적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자료집으로 개발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실용적이어서, 호응이 좋습니다.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질 높은 소책자가 되도록 연구, 개발하고 있죠. 또한 역사문화해설사 교육이 가능하도록 교재개발에 쓰고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문화원장으로서 또는 인간으로서 김장호의 삶, 앞으로의 포부 등을 말씀해 주세요.


□  문화원장으로써 작게는 지역을 보지만, 큰 틀거지에서 보면 결국 문화를 볼 수밖에 없어요. 용인시는 지금

급격하게 팽창하고 있고, 그에 따라 시민과의 접점 마련이 어렵습니다. 앞으로 해결해야할 과제이기도 하죠. 이

미 문화 분야가 대단히 세분화되어 있어서, 예술의 장르별, 계층별, 문화적 성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

것을 합쳐야 합니다. 용인시의 정체성 확립 및 옛 문화의 보존, 발굴도 문화원의 중요한 역할이지만, 각 분야를

  아울러 서로 힘을 모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곳이 바로문화원입니다.

문화원은 일반 사회단체가 아닙니다. 법에 기초를 둔 조직이며, 용인 문화발전, 진흥을 위한 기관입니다. 마을

지를 다 냈으니까 문화원의 역할이 끝난 것 아닌가? 하고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대로 아니죠. 저희의 경

우, 마을지의 성과와 노하우를 바탕으로 ‘용인학’이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지역학으로서의 위상을 높이고자 용인

내 대학교에 ‘용인학’강좌를 개설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처럼 지속적인 발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조심스럽지만, 전국의 문화원장들이 지역문화발전을 위한 소신을 가지고 그에 기여하는 것으로 만족해 주

셨으면 좋겠어요. 정치적 진출을 위한 목적이 끼게 되면 문화원은 침해를 받게 됩니다. 한 개의 문화원이 그렇게

되면 전국 문화원이 피해를 보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문화원이 너무 젊어져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문화원의 위상이 시 행사의전 때 먼저 소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연스럽게 존경받는 위상을 가질 수 있도록 문화원이 체질개선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문화원장이 되면 문

화원에 전념해야 합니다. 같이 밥 먹고, 술 마시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소통하고 화합하는 분위기를 만들

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내가 그들을 책임져 주고, 보호해주는데 오해가 쌓일 일이 없지요.

  마지막으로 평생을 봉사하면서 살아온 것이 지금 내 인생의 전부입니다. 남을 위해 사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

며,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 삶의 기쁨입니다.



인터뷰하면서 내가 벅차게 한 세상을 달려온 것 같은 느낌이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명확하게 분리해서 사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과거를 알고, 현재를 이해하면서 미래를

준비해나가는 자세가 몸에 베인 듯한 인상이다.

문화원장으로서 직분을 자랑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문화원이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더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듯하다. 문화원장이 되면서 이미

임기 후를 준비하는 모습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쉽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운다.


Posted by 경기도문화원연합회

경기도 문화원 기획사업 심층취재 -과천문화원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공간 운영을 고민하다


시스템이 안정화 될수록 유연한 적용은 규정위반으로 분류되어 버리는 현상이 발생한다.

문화예술 활동에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한때 인생의 반을 투자해 벌어들인 대가로 아파트 한채 장만한다는 비감어린 말끝에는 그래도 달콤쌉싸름한

뒷맛이 감도는 위로 같은 것이 있었다. 아무튼 도심에서 개발공사가 이루어지던 곳의 대부분이 아파트 건설에

의한 것으로 기억된다. 집단 주택에 대한 왕성한 수요와 끝도 없이 뛰는 땅값은 공적 공간을 마을 중심에서 비켜

난 외곽에 자리 잡게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건설비용의 효율성과 용지확보의 용이성 등을 이유로 목적이 다른

공공시설마저도 특정한 곳에 모아 짓는 공공시설의 집단화 현상이 지역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과천문화원(이영구 원장)은 1990년에 만들어진 20년이상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11년 6월에 새로운

문화원사를 건축하여 이사하게 되면서 이웃하는 새로운 공공시설과 함께 문원동에 자리하게 되었다. 보다 넓고

많아진 새로운 공간은 항상 반가운 것만 아니다. 더구나 공적 영역의 공간일 경우 크고 근사한 건물은 짐이 될

수 있다. 시민의 세금으로 세워진 공간은 시민들이 사용하지 않을 경우 존재에 대한 물음이 언제고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다. 앞뒤 맥락이 꼬이기 시작한다. 시민 접근성이 좋은 곳에 시민을 위한 문화시설

이 있어야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얘기이지만, 그런 부지를 확보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또한 누구나

알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얘기. 이쯤에서 꼬인 문제의 해법은 운영하는 자의 몫으로

넘겨진다. 지은 것은 과거이고 활용에 관한 것은 당장의 일이라면서. ‘짓는다’는 행위 이전에 꼼꼼히 따져 물어

야할 것들은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다. 어찌되었건 지금은 새로운 원사를 갖게 되었고 몇 개의 공공건물이 한곳

에 모여 있는 곳에 위치한 과천문화원 장경호 국장은 새로운 화두가 생겼다고 한다.


“ 문화원이 새롭게 지어졌는데 이 일로

    지역사회는 좋아진 것이 있는가?”


  이 말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공간활용에 방점이 찍혀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원 공간은 시민의 공간이다. 그동안 프로그램과 체험, 행사 위주로 문화원을 운용해 왔다면, 새로운 원

사로 이전한 시점에서 공간활용에 대한 역할도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런 생각의 시작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화단체들과의 접촉에서 시작되었다. 문화원은 특수법인으로 법적 제도에 의해 공간지원이 가능하다.


  그러나 문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대부분은 비영리단체로 등록되어있거나, 사단법인으로 운영되는 단체들이라 해도 사무공간을 갖추고 있을 뿐, 프로그램 진행을 위한 공간을 갖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단지 행정과의 관계는 보조금지원 관계일 뿐이다. 단체가 아닌 시민들이 모인 문화예술활동의 경우도 공간에대한 필요성은 절실하다.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는 문화시설이나 단체들은 이해관계에 의해 지원의 정도차이가 발생한다. 같은 지역

사회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다는 동일한 입장이라고 본다면, 한정된 특정 공간을 영역화 혹은 영토화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과 공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

이라고 본 것이다.

  과천문화원은 그 동안 사업과 프로그램을 통해 양적 팽창을 해왔다. 이제는 지역차원에서 지역 문화 활동의 허브역할에 충실을 기하면서 공간에 대한 매개 기능이 필요한 때라고 보는 것이다.

  새로운 원사로 입주하고 우연한 기회에 내부뿐 아니라 바깥에도 활용하기 적당한 공간이 만들어졌음을 나

중에 알게 되었다. 의도해서 만들어진 야외공연공간이 있는가 하면 의도하지 않았으나 작은 공연을 하기에 꽤 알맞은 자리가 생겼음을... 춤동아리 팀이 공연해도 되는지를 묻는 과정에서 공연무대가 아닌 건물과 건물사이에 만들어진 공간을 찍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다. 예술이 갖는 비정형성의 매력이랄까. 공연하면 무대가 되는 공간.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공간의 용도가 바뀌는것은 멋진 일이다. 있어 보이는 말로 하면 활동에 의한 새로운 의미의 생성이고 활동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순간, 이것이 주체성이지 않을까?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간이 만들어진 목적에 어긋나는 행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공간운영을 위해 정해

진 규칙이 오히려 자유로운 문화예술활동에 장애가 되는 셈이다. 시스템이 안정화 될수록 유연한 적용은 규정 위반으로 분류되어 버리는 현상이 발생한다. 문화예술활동에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효율이 낳은 유연함 부재에서 오는 비효율.

  어쨌든 춤동아리들과의 관계는 새로운 공간이 창출되는 새로운 경험을 가져다주었다. 공간에 맞는 연출의

변형도 기꺼이 감수하는 춤동아리들의 유연함에 문화예술이 갖는 재해석의 능력을 느낀 셈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문화원 야외공간에서 전통결혼식을 치룬 뒤 피로연까지 야외에서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비 때문에 피로연을 실내에서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 했다.

  옥상은 도시농부 일환으로 여러 가지 작물들이 심어져있었다. 이 공간과 이어진 실내공간은 회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회의 공간 내부와 작물이 자라고 있는 외부공간을 연결하여 피로연 공간으로 변형시켰다. 테이블을 꽃으로 장식하고 옥상공간의 녹색식물과 연동시킨 분위기가 피로연회장으로 손색없었다. 이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문화원이 갖고 있는 오래된 경험의 축적 때문이다.

  현재 과천도시농사꾼을 주관하고 있는 과천도시 농업포럼 손병남 대표는 태교로 시작한 취미활동이 여러

대회에서 수상하는 기쁨을 주었고, 과천 문화원에서 주부들에게 꽃꽂이를 가르쳤다. 이 활동은 2006년 한국사이버원예대학을 과천문화원에 개설하게 되는 단초였으며, 지금은 (사)과천도시농업포럼을 통해 과천에서 도시생태농업 육성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과천문화원 옥상에 만들어진 ‘·하눌타리’«는 알고 보면 20년 이상의과정을 품고 있는 셈이다.

  커다란 울타리라는 의미의‘·한 울타리’·와 야생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 덩굴식물‘«하눌타리’·의 다의적 표현이라고 한다. 하눌타리는 박꽃처럼 하얀 꽃을 피우면서 텃밭 가장자리에 자라는 작물로 작물과 비작물의 경계에 있는 식물인데, 일부러 재배하지 않지만 귀중한 약재로 쓰인다고 한다. 작물 아닌 작물. 쓸모와 쓸모없음의 경계에 있는 하눌타리는 어쩌면 예술이 갖는 비정형성을 닮아 있다.


“ 새로이 지어진 문화원이 지역사회에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처음 물었던 화두를 다시 바꾸어 물어보고자 한다.첫 물음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이나 여기의 핵심은

역할이다. 즉, 구체적 실천에 대한 고민이다. 시민의 의견을 받아들여 허가를 내주는 형식을 취했다면, 문화활동가 입장에서 시민에게 제안하는 열린공간 운영이라는 적극적인 태도일 것이다. 어떤 것을 실천할 수 있을 것 인가? 라고 묻는다면 곧 바로 이런 대답이 나올 것이다.‘«뭘 원하는지 알아야겠죠!’과천문화원 장경호 국장의대답이기도 하다.

  수요에 의한 공간의 활용. 또는 공간의 재탄생. 시민들이 원하는 활동에 맞는 공간 활용의 제안. 이러한 수

요와 공급의 흥미로운 쌍방향 대응. 어떤 모습으로 발현 될지 예측하지 못하므로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공공시설로서 과천 문화원 운영의 새로운 접근을 어떻게 시도해 갈지, 경기도내 손에 꼽히는 앞서가는 문화원으로 새로운 시도가 갖는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Posted by 경기도문화원연합회

경기도 문화원 기획사업 심층취재 -이천문화원

백 투 베이직


이천은 행복한 지역이다.


  땅 좋고 물 좋기를 타고난 곳이라, 이천하면 바로 임금님 진상미로 유명한 쌀이 떠오르고 세계도자기축제로 유명해진 캐릭터 ‘¬토야’±가 떠오르니 말이다. 물론 지금도 왕릉이 뒷동산처럼 웅장하게 자리한 경주나 산세가 빼어난 전라도와 견준다면 좀 그렇겠다만 생각해보라, 급속히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애매하게 지역이 나뉘어진 도시에 비하면 행복하다 말다뿐일까. 도대체 뭘로 문화관광업무를 봐야할지 모르겠다는 수도권 인근 도시들도 제법 있기 때문이다. 도시마다 그 도시를 대표할 브랜드나 도시 상징으로서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 하는 도시에서 볼 때 이천은 문화자산이 풍족한 도시다.

  이천이 쌀과 도자기 도시로 유명해진 데는 이천 문화원의 공이 크다.

  1987년부터 설봉문화제를 이천문화원이 주관 하면서 민속행사, 문예행사, 청미문화제를 아우르는 문화 예술축제를 진행해왔다. 이 안에 도자기축제는 일부를 담당하는 작은 축제였다가 1995년 9회 때부터 문화체육부 시범축제가 되면서 독자적인 축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2001년 세계도자비엔날레로 확대되면서 국제축제로 확대되었다.2010년에는 공예분야에서 유네스코 창의도시로 지정되면서 도자와 관련된 역사와 생활을 담고 있는 고장으로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가을이 되면 이천 쌀문화축제가 열린다. 멍석만들기, 새끼꼬기, 짚신삼기 등 짚풀공에 체험과 쌀가마니 지게지기, 재래식 탈곡하기, 가마솥 햅쌀밥짓기, 임금님 쌀 진상행렬 등 다양한 전통농경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코너를 마련하고 있다. 지리적 자산이라는 혜택과 함께 역사와 전통이 덧대어져 훌륭한 도시의 정체성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이런 축제들이 흥겨웠던 것은 삶의 결실을 나누고 자축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깊게 생각해봐야할 것은 이러한 전통들이 우리의 생활 그 자체였지만 도자기 구워 그릇을 만들고, 멍석과 짚신을 삼아 실생활에 유용한 생필품을 만들었던 행위가 지금의 ‘±내 일’±은 아니다. 지금을 사는 지역 젊은이들이 느끼는 진상미와 토야에 대한 체감은 분명 다를 것이다. 내 지역을 대표하는 일련의 행사들이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 행위와 멀어지면서 나타나는 이런 소외현상....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메워가야 할 것인가?



지역문화에 대한 고민


  그래서 이제는 지역문화자산에 접근하는 방식을 달리해보고자 한다. 주어진 환경을 소중히 여기고 이것을

기본으로 주체적 입장에서 문화를 해석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지역문화를 나와 연결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민인 것이다. 이천문화원 이동준 국장은 여기에 대해 구체적 실천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한 지역문화,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과 매체를 통해 활발하게 소통하는 방식은 어떻게 시작될까? 이동준 국장은 이렇게 말한다.

  첫째, 질 높은 문화교육, 문화프로그램을 개발하고자 한다.

  1998년 한국문화학교로 지정된 이래 이천 시민들에게 지속적으로 문화적 욕구를 채워가며 성장해 가기 위한 정보제공과 지원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문화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둘째, 시민들에게 충실한 문화콘텐츠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온라인, 오프라인 문화정보 서비스 기반을 마련해서 문화원 내부의 업무효율화와 체계화를 위해서 뿐 아니라 이런 자료들을 시민들이 쉽게 검색하고 찾아 활용하여 창의적인 문화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DB화를 추진한다.

  셋째, 지역의 문화창달을 위해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다.

단순업무지원이나 자원봉사체계가아니라 문화지도력 육성체계를 갖춘 인력을 양성한다. 지역문화가 성장하기 위해 문화마인드가 있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 문화원 내부에서는 기초자료를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밖으로는 이천문화원이 자랑하는 탐방 프로그램에 대한 정교화작업을 추진하고자 한다. 올해로 10년째 맞는 주말문화탐방 프로그램은 나를 알기위해 남을 보면서 지역의 정체성과 이천이 갖고 있는 지역문화의 본질을 더 선명하게 알게 하고자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동준 국장이 말한 것 처럼 홍운탁월법 즉 이것을 그리고자 저것을 그리는 방식같이 다른 지역을 보고 우리지역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느끼고자 주말탐방프로그램을 운영했다면, 이 과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형성된 시민의식을 이제는 본격적으로 확인하고 정리해보는 후속작업을 해보고자 한다. 그래서 주말 문화탐방의 ‘°학습적 효용가치’°를 확대 하려는 노력과 함께 가족에서 아동대상으로, 어르신과 문화소외계층 등으로 특화시켜나가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고장 알기 프로그램을 세부화시켜 진행하고자 한다. 유적의 발굴과 정리 단계를 넘어 교육, 문화체험, 자연생태, 예술, 청소년문화 등 다양한 문화영역에 걸쳐 현대를 접목한 문화창출의 단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래서 이천만의 독특한 문화콘텐츠, 우리들의 이야기가 담긴 우리들의 문화를 만들어 지역사회가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기 위해 지역사회가 함께 논의하는 장을 마련해야한다. 시민들의 문화욕구에 대응한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실천하려면 각 시설과 단체 등 이천시에 있는 여러 주체들이 한자리에 모여야 한다. 지역사회의 물적, 인적 자원의 결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항상 있어왔던 내용들이다.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지역사회의 자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을 해야 한다고... 언제는 이런 얘기 안했나? 하는 자조어린 말도 나올 것이다. 맞는 말이다. 지역사회 여러 조직들이 한자리에 모여 잘해보자고 말하고 그걸로 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 아니 차선도 될수 없다는 것은 무엇보다 확실하다. 이천이 눈에 보이는 확실한 지역적 자산에 비해 보이지 않는 훌륭한 인물들에 대해 알리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소홀하다. 이천에 서당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서원이 있었다는 것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와 중요성은 세월이 지날수록 깊어지는 법이다. 성리학의 대가 모재 김안국, 남당 엄

용순, 규정 강은 등과 같은 인물들에 대한 자료에서 부터 이천지역에 글쓰기 위해 오신 이문열 선생님까지 기록할 것은 정말 많다. 전통은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원료material가 충실해야 훌륭한 물건object이 만들어진다. 우리의 것들을 모아야 우리지역만의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다. 그래서 기초자료의 데이터베이스 작업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하다 중단하면 안한 것만 못하다. 길고 오래도록 인내하면서 가야하는 작업이다. 단지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왜 하는지에 대한 목표와 활용방안을 지역에서 충분히 논의했으면 한다. 인터넷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은 데이터베이스 작업 자체로 가치를 획득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문화원에서 시작한 데이터베이스 작업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러나 시작이 있다면 끝을 꿈꿀 수 있다.



Posted by 경기도문화원연합회

향토문화

역사의 과거, 현재와 미래


인간은 과거(역사)로부터 배우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Man learns from the past and builds on it)


최무장(경기도향토문화 연구소장)






Ⅰ.시작말


  한반도 면적은 220.000㎢이다. 현재 북한 지역은 123.000㎢이며 남한은 97.00㎢이다. 한반도 기후는 1년의 4계절이 뚜렷하지만 지역 간의 차이는 현저히 다르다. 한반도의 북쪽 경계지역은 중국과 러시아와 연결되어 있으며, 기타 3면은 바다에 면해 있다. 그리고 좁은 땅덩어리 사이에 지역 간의 언어 차이도 뚜렷하다.

  한민족은 고아시아족(Paleoasiatic) 또는 고시베리아족(Paleosiberians)에 속하며, 언어도 이웃 중국과 완전히 다른우랄알타이Ural-Altai 계통이다. 비록 우리는 철기시대(기원전 300~기원전후)부터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인 언어와 생활 묘사 등을 중국문자를 빌려 사용하였지만, 전통적인 우리 문화는 1910년 일본에 식민지화되기 전까지 유지되어 왔다.


  우리 민족의 기원을 살펴보면, 기원전 10세기경 예맥濊貊 족이 형성되었으며, 이 예맥족으로부터 기원전 5세기경 부여夫餘족이 독립되어 최초로 도시국가(city-state)가 탄생되었다. 또한 이 도시국가로부터 기원전 1세기경 고구려, 백제, 신라 등 3국이 도시국가를 세웠다.

  고고학 측면에서 적어도 50~30만 년 전에 이 땅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기원전 6.000년경에 사람들이 큰강가에 정착하여 곡물재배(기장, 피, 수수, 조, 쌀 등)와 가축사육(개, 돼지, 소, 사슴류 등), 마제석기(돌도끼, 창날, 화살촉, 칼)와 토기(빗살무늬토기, 무문토기) 등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움막집에 지붕을 덮어 생활하거나 죽은자들을 매장시킨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고인돌(Menhil) 문화 즉 거석문화는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대표적이며, 한민족의 가장 대표적인 선사문화 중 하나이다.

  고대국가간의 문화차이 즉 고구려, 백제, 신라 왕국사이 또한 지역 간의 문화차이는 기후와 주어진 환경(암석과 토양) 차이로 재배 농작물의 차이가 뚜렷하다. 예로 대나무는 남쪽지역(따뜻한 기후)의 전남지역부터 충남 공주 또는 부여지역까지 자라고, 그 이북 지역은 재배가 불가하다.



“인간은 과거(역사)로부터 배우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Man learns from the past and builds on it) 는 의미를 깊이 인식 할 필요가 있다.

 


우리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다. 비록 1910년에 일본에 식민지화되고, 1950년 북한 공

산당의 공격을 받아 비참한 생활사가 약 30년간(1980년) 지속되었지만, 현재는 남한 대

부분의 가정에 1대의 자가용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문화생활이 발전되었다. 1910년부

터 금년 2012년까지 약 100년의 시간이 지나 갔다.



Ⅱ.과거


1949년 6월17일, 서울 특별시사 편찬위원회 설치, 매년『향토 서울』 출판.

1950년 6.25 전쟁 이후, 향토문화 연구원 시작


● 1956년 4월5일, 경주, 신라 문화 동인회

● 1965년, 고령, 대가야 향토사 연구회

● 1969년, 대구, 향토문화 연구회

● 1972년, 광주, 향토문화 개발협의회

● 1976년, 부여, 백제사적 연구회

● 1976년, 전주, 전북향토 문화 연구회

● 1978년, 충주, 예성동호회(예성문화연구회)


  위와 같이 다양한 연구소와 연구회를 통해 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대한 조사연

구가 시작되었다.



Ⅲ.현재

  

  2010년까지 73곳의 연구소 또는 연구회가 한국 향토사 전국협의회에 등록되었다.

강원 7곳, 경남 5곳, 전남 11곳, 경북 10곳, 서울 5곳, 경기·인천 등 9곳, 전북 8곳, 제주

2곳, 충남·대전 12곳, 충북 12곳 등이다.




Ⅳ.미래


  상기한 73곳의 향토 연구소 또는 연구회는 장래 한반도 전통문화 즉 한민족의 뿌리 문화

를 연구하는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각 지역의 기후와 지질환경, 그리고

선사와 역사시대의 문화유적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지표조사를 실시 할 필요가 있다. 예

로 신석기 시대(기원전 6.000~1.000년)의 마제석기와 토기(빗살무늬토기) 그릇 등의 잔편

이 여기저기 많이 흩어져 있지만 최근 농경이 기계화되면서 중장비의 차량이 지나다니면서

산산이 조각되어 장래 약 5년 이내에는 도자기 1편도 채집이 불가능하게 될 것으로 예측되

고 있다. 지표 조사는 리, 읍, 면과 군, 특별시등으로 나누어 서서히 하면 된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선돌(Menhil)도 철저히 조사되어야 하며, 도로포장과 신도시 건

설로 고인돌과 선돌 등을 옮겨서는 절대 안 된다. 문화재는 현장 그대로 영원히 보존되어야

만 상석의 방향, 지석의 축조상태와 주위의 환경에 따른 축조법을 인식하게 된다.


  조상들의 무덤도 그 자리에 영구히 보존되어야 하며 다만 미래에는 새로운 장소(공동묘

지) 등이 조성되어야 한다. 이 땅에 최초의 공동묘지는 일본인들에 의해 조성되었다. 조선

왕조의 가장 큰 실패는 1910년, 일본인들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지역 선사문화에 대한 철저한 지표조사, 지역에 잔존된 무덤문화, 또한 현인에 의해 전

속된 무속문화, 지역 간의 언어차이, 제례의식, 예로 아파트에서 새로운 아이가 태어났을 때

걸어 놓는 새끼줄(금줄)에 고추 또는 숯을 매달 수 있을까?


  또한 전통 가옥의 앞문방향, 우물터와 변소 위치 등에 관한 조사도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 지역 간의 전래된 이야기, 선조들이 간직한 서적과 그림 등, 그리고 동네 굿들에 대한

정리도 철저히 하여야 하며, 메주, 간장과 곡식저장, 모자, 옷, 신발 등의 제작과정과 보존상

태도 영구히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지역 간의 언어학적 구분(확인)도 철저히 하여야 되며 우리 생활 속에 외래어, 예로 우리

가 먹는 보리(barley)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어느 곳에서 시작되었는지 확인되어야 한다.


  인간 사회조직은 남과 여, 결혼과 잉태로 소위 가족(family)이 생기고 가족의 자식이 3명

이상으로 또 다른 각자의 가족형태를 갖출 때 씨족(clan)이 된다. 신석기시대는 이것을 모

계 씨족사회로 부르고, 금속농구 사용 시기(청동기, 철기시대)의 시작으로 경작지를 사유제

로 인정시키면서 부계 씨족사회로 발전되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즉 가족→씨족→촌

락(village)이 형성되고, 물물교류 중심 장소로 도시(city)가 탄생되고 세금납부와 신앙→종

교 등에 의해서 새로운 단체 등의 행정기구와 학교 등이 탄생된 예를 참고하자.


Posted by 경기도문화원연합회